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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리츠 멜히오르 (1890-1973)

♣ 풍경소리~~♬ 2006. 11. 8. 16:37
라우리츠 멜히오르 (1890 - 1973)
99년 11월 제9호

Lauritz Melchior

글: 황지원

 
베스트 음반 10선
바그너: "발퀴레" 1막
브루노 발터 지휘, 로테 레만, 엠마누엘 리스트 (EMI)
1935 Mono

바그너: "발퀴레" 2막
브루노 발터 지휘, 한스 호터, 로테 레만, 엠마누엘 리스트 (EMI)
1938 Mono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토마스 비첨 경 지휘,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EMI 4CD)
1937 Mono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라인스도르프 지휘, 헬렌 트라우벨 (NAXOS)
1943 Mono

바그너: "신들의 황혼"
아르투르 보단즈키, 프리드리히 쇼르 (NAXOS)
1936 Mono

Four Famous Wagnerian Tenors
막스 로렌츠, 토르스텐 랄프, 세트 스반홀름 (PREISER)
Mono

Prima Voce - Melchior
(NIMBUS) Mono

Helen Traubel and Lauritz Melchior sing Wagner
(SONY) Mono

Flagstad/Melchior: Arias & Duets
(PEARL) Mono

바그너: "발퀴레",
"트리스탄과 이졸데" 발췌
토스카니니 지휘 (RCA)
Mono
 
LAURITZ MELCHIOR
멜히오르의 초상화
 
헬덴테너 (Heldentenor)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영웅적인 테너' 정도가 될터인데, 대체로 바그너 오페라에 어울리는 테너를 가리킨다. 바그너 테너들의 발성은 이탈리아 테너들의 그것과는 애초 그 지향점이 다르다. 음역에 관계없이 완벽하게 형성되는 비브라토, 밝은 색감, 고운 질감의 서정적 선율성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테너들에 비해 바그너 테너들은 유난히 긴 프레이징과 무겁게 가라앉은 장중한 음색으로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쪽이다.

음역도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일단 고음쪽에 방점이 가있다. "청교도","라 보엠"의 하이 C나 '공주는 잠못 이루고'의 마지막 B음은 가수에게나 청중에게나 늘 관심의 대상이다. 반면 바그너 오페라에선 중음에서 고음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음역대 (흔히 Il Passaggio라고 한다)가 길게 늘어지면서 등장한다. 이 음역대를 가볍게 넘나드는 기술이 이탈리아 테너들의 주된 관심사라면, 이곳에서 길게 지속되는 음을 안정감있게 내야하는게 바그너 테너, 즉 헬덴테너들의 지상과제다.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발퀴레" 등의 테너 최고음이라야 2옥타브 A이며 이는 바리톤 최고음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바리톤도 힘들어하는 무거운 저음이 곳곳에 등장하고, 2옥타브 E ~ G음 (즉, Il Passaggio) 사이에서 긴 호흡의 프레이징을 요구하는 부분도 많이 나온다. 결국 헬덴테너는 바리톤에 가까운 충실감있는 중저음을 풍부하게 낼 수 있는 테너여야한다. 이런 까다로운 요구조건 때문에 헬덴테너의 숫자는 시대를 불문하고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 한 시대를 넘어서서 영원불멸의 전설적인 존재가 된 헬덴테너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라우리츠 멜히오르다.

멜히오르의 생애
라우리츠 레브레히트 홈멜 멜히오르 (Lauritz Lebrecht Hommel Melchior)는 1890년 3월 20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 공교롭게도 이날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리릭 테너 베냐미노 질리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18살때 덴마크 왕립 오페라 학교에 입학한 멜히오르는 파울 방 (Paul Bang)이란 선생의 지도아래 바리톤 수업을 받았다.
LAURITZ MELCHIOR
젊은 시절의 멜히오르
 
그의 공식데뷔는 23살때인 1913년에 이뤄졌는데, 작곡가이기도 한 칼 닐센의 지휘로 공연된 덴마크 왕립 오페라단의 "팔리아치" 공연에서 비중있는 조연인 실비오역을 노래했다. 그후 이 오페라단의 정규단원으로 8년간 바리톤역을 꾸준히 불렀는데, "라 트라비아타"의 듀폴 남작,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백작, "파르지팔"의 성배수호기사, "탄호이저"의 하인리히 데어 슈라이버, "카르멘"의 모랄레스, "마탄의 사수"의 오토카르 후작 등이 레퍼토리였다.

바리톤에서 테너로의 전향은 아주 우연스런 계기로 이뤄졌다. 어느날 "일 트로바토레"의 바리톤 루나 백작으로 출연한 멜히오르는 4막 레오노라와의 듀엣에서 하이 C를 터트렸고, 마침 아주체나를 노래하던 미국의 명 콘트랄토 사라 카이어 (Sarah Cahier) 여사가 이를 지켜보고는 멜히오르는 바리톤이 아니라 테너임을 지적했다. 그후 그는 1년간 유급휴가를 얻어 당시 코펜하겐의 이름난 테너 가수 빌헬름 헤롤드 (Wilhelm Herold, 1865 - 1937) 밑에서 헬덴테너로의 변신을 꿈꾸며 맹렬한 트레이닝을 쌓았고, 1918년 10월 8일 "탄호이저"의 타이틀롤로 테너로서의 새로운 캐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멜히오르는 미완의 대기 정도로만 여겨졌고, 실제로 "팔리아치"의 카니오와 "삼손과 데릴라"의 삼손역 외에는 더 이상의 출연섭외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기일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멜히오르는 우연찮게 영국의 저명한 작가 휴 월폴 (Hugh Walpole)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멜히오르의 비범한 자질을 간파한 월폴은 그의 후견인임을 자처했고 그에게 당시 영국의 유명한 성악교사 빅터 바이겔 (Victor Beigel)을 소개시켜 주었다. 멜히오르의 목소리를 체크해 본 바이겔은 그를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 프란츠 샬크 (Franz Schalk)에게 보냈고, 샬크는 멜히오르를 전설적인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안나 바르-밀덴부르크 (Anna Bahr-Mildenburg)에게 보내 정통 바그너 창법을 익히게했다. 밀덴부르크에게 배우며 음악적으로 급성장한 멜히오르의 명성은 어느덧 바그너의 미망인이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실질적 주관자인 코지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멜히오르는 오디션을 거친 후 1924년 페스티벌에서 파르지팔과 지그문트를 노래하게 되었다. 멜히오르는 이후 1931년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노래했는데, 로엔그린을 제외한 탄호이저, 트리스탄, 지그문트와 지그프리트, 파르지팔 등을 불렀으며, 코지마로부터 '위대한 덴마크인'이란 찬사를 들을만큼 놀라운 예술적 성과를 이뤄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다음부터는 멜히오르의 캐리어는 순풍에 돛을 단듯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24년 코벤트 가든 데뷔, 1925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데뷔 등 가는 곳마다 대성공을 거두면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1926 - 27년 시즌에서 데뷔무대를 가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르투르 보단즈키의 지휘로 마리아 예리차, 프리드리히 쇼어와 함께 출연한 첫무대 "탄호이저"의 반응이 신통찮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데뷔시즌에선 8번 노래하는데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에선 아예 한 번 밖에 출연하지 못했다. 이는 연주력이 신통찮았기보다는 아직 그의 레퍼토리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무대경험이 부족해 노련미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트리스탄을 노래할 줄 몰랐고 무대에 서면 혈기만 왕성한 가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함부르크 주립오페라단으로 옮겨 일주일에 4일을 노래하는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며 레퍼토리 확장과 무대경험 쌓기에 온 힘을 쏟았다.

Melchior and his wife
멜히오르와 그의 아내
 
그가 메트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29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역으로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30년대는 히틀러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바그너 가수들이 많아, 이때를 가리켜 바그네리안의 황금시대라고도 일컫는다. 프리다 라이더, 로테 레만, 프리드리히 쇼어, 헤르베르트 얀센, 카렌 브란젤,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등이 모두 이 당시 메트를 주름잡던 바그너 가수들이다. 멜히오르는 이들과 함께 수많은 바그너 오페라들을 무대에 올렸으며, 특히 플라그슈타트와의 호흡은 칼라스 - 디 스테파노에 비견될 정도로 절묘했다. 멜히오르는 1950년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메트로폴리탄을 대표하는 부동의 바그너 가수로 515회라는 엄청난 공연횟수를 기록했다.

무대에선 신비감이 넘치는 영웅적 테너였지만, 사생활에선 술 잘먹고 과식을 즐기며, 사냥에 푹빠져있던 전형적인 덴마크인이었다. 장난기가 지나쳐 플라그슈타트와의 관계가 파국을 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의 이런 인간적인 약점을 잘 커버해준 것은 두번째 부인 클라인헨 (Kleinchen Melchior)이었다. 그녀는 명테너의 내조자일뿐만 아니라 노련한 매니저이기도 해, 멜히오르가 캐리어의 절정기에 있을 때부터 당시 새로운 미디어로 급부상하고 있던 영화와 라디오 매체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게 했다. 덕분에 멜히오르는 MGM의 다섯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요즘의 파바로티마냥 대중적 인기를 누린 슈퍼스타가 되었다.

멜히오르에 의하면 바그너 테너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하이 바리톤 중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가수들을 오랜 기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이런 믿음은 은퇴 후 '멜히오르 헬덴테너 재단 (Melchior Heldentenor Foundation)'을 설립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고, 이 재단은 유망한 젊은 가수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레바인 지휘의 "니벨룽의 반지"에서 지그문트로 열연한 테너 게리 레이크스 (Gary Lakes)도 이 재단의 수혜자이다.

은퇴 후 여생을 후진양성에 주력하던 멜히오르는 1973년 5월 18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LA 타임즈, UIP 통신, AP 통신, 뉴욕 타임즈 등 주요 언론이 그의 죽음을 이례적으로 특필하였고 닉슨 대통령도 이 위대한 테너에 조의를 표하였다. 지금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한쪽 벽면에는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와 나란히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멜히오르의 음악
바그너 오페라를 어떤 식으로 불러야하는가는 바그너 생존 당시부터 끊없이 이어져온 논쟁거리였다. 금세기초엔 아예 독일의 각 지역별로 주장이 갈려, 드레스덴 지방에선 달콤한 서정과 정교한 음악성을 강조하는 스타일이, 뮌헨에선 초기 독일 스타일을 고수하자는 입장이 세를 얻었다. 베를린은 양자를 절충한 가운데 좀더 수수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주장의 장점을 골고루 수용하는 쪽으로 정리가 되어갔는데, 특히 카루소의 음반이 출시되면서 독일 가창에도 좀더 서정적인 면모를 강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인식이 생겼다. 결국 1차대전이 끝날쯤에는 가사의 전달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인 독일 스타일과 당시 국제적인 지지를 획득하고 있던 선율성을 강화하는 발성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타협을 본 이른바 '바그너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라우리츠 멜히오르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성악가로, 비슷한 연배의 프리다 라이더, 로테 레만, 프리드리히 쇼어, 루돌프 보켈만 등과 함께 바그너 가창 스타일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흔히 마리오 델 모나코를 가리켜 '황금의 트럼펫'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비유를 멜히오르에게도 해본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황금의 호른'이란 표현을 쓰고 싶다. 금관의 거치른 외침과 목관의 섬세한 리리시즘이 절묘하게 섞인 호른처럼, 멜히오르의 목소리도 드라마틱함과 서정성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듯한 두 요소를 한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벨벳과도 같은 부드러운 유연함과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폭발적인 성량은 지금도 달리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다.

멜히오르의 또다른 특징은 전음역이 어둡고 깊게 발성된다는 데 있다. 이는 요즘의 헬덴테너들과 비교해보면 좀더 확실해진다. 바이로이트의 지그문트인 포울 엘밍이나 메트의 게리 레이크스의 경우 지나치게 밝은 색감으로 인해 신비감이라던지 초인적인 존재로서의 이미지는 약한 편이다. 반면 멜히오르는 마치 전음역에서 커버링 (covering)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음영이 짙은 깊은 음색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의 완벽한 저음과 초인적인 스태미너도 감탄의 대상이다. "발퀴레"의 지그문트는 바리톤도 두려워하는 낮은 음들과 고음의 긴 테누토로 악명이 높지만 멜히오르에겐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Melchior as Sigmund
"발퀴레"에서 지그문트로 분한 멜히오르
 
멜히오르는 거의 모든 바그너 테너역들을 노래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은 223회, "발퀴레"의 지그문트는 181회, "탄호이저"의 타이틀롤은 144회 노래했으며, "지그프리트"의 타이틀롤은 121회, "신들의 황혼"의 지그프리트는 106회에 달한다. "파르지팔"의 타이틀롤도 80회나 노래했다. "마이스터징어"의 발터 폰 슈톨칭이나 "리엔치"의 호민관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조타수 등은 실제무대에서 노래한 적은 없고 음반 등으로만 남아있다.

출연횟수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가장 자신있게 노래한 것은 트리스탄과 지그문트였다. 트리스탄의 경우 비첨 지휘의 EMI 음반과 라인스도르프 지휘의 메트로폴리탄 실황 (NAXOS HISTORICAL) 등이 전곡으로 남아있는데, 각각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와 헬렌 트라우벨이 이졸데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1937년 음반은 그의 최전성기 목소리를 담은 데다가 필생의 파트너라할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와의 공연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한편 "발퀴레"의 지그문트의 경우도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발터가 빈필을 지휘한 1935년의 1막 전곡녹음 (EMI)이 압도적인 명연으로 남아있다. 토스카니니의 지휘 아래 헬렌 트라우벨과 "발퀴레", "신들의 황혼"의 주요장면을 노래한 RCA 레이블의 음반도 놓칠 수 없다. 특히 "신들의 황혼" 2중창에서 지그프리트를 노래하는 멜히오르의 영웅적인 열정은 한번 들으면 쉬잊을 수 없는 것이다.

멜히오르는 독집음반도 풍부하게 갖고 있다. 살아생전에 300장이 넘는 레코드를 취입했으며, 특히 DANACORD란 마이너 레이블에서는 엄청난 양의 멜히오르 독집 에디션을 발매한 적도 있다. EMI, NIMBUS, VOCAL ARCHIV, PREISER 등 다양한 레이블로 출시된 그의 독집 CD들은 바그너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그가 간혹 연주한 이탈리아 드라마틱 테너의 레퍼토리까지도 담고 있어 그의 인간미 넘치는 탁월한 예술성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폴란드인 쟌 데 레즈케로부터 시작해 멜히오르와 세트 스반홀름에서 정점을 이룬 20세기 초반의 헬덴테너 계보는 2차대전이 끝난 금세기 중반부터 볼프강 빈트가센, 제임스 킹 등이 등장하면서 한차례 황금기를 이뤘고 그 뒤를 이은 르네 콜로와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등이 한 세기의 위대한 전통을 마감하는 형국을 이뤘다. 내년부터 시작될 2000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밀레니엄 링"은 플라시도 도밍고와 볼프강 슈미트를 새 천년의 지그문트와 지그프리트로 선택했다. 멜히오르의 음반을 들으며 다가오는 21세기의 헬덴테너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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