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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외탕의 삶과 음악

♣ 풍경소리~~♬ 2007. 10. 3. 17:52


 

 


근대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이며, 베리오와 함께 근대 프랑코-벨기에 바이올린 악파의 지도자로 불리는 비외탕.
음악이 깊숙히 스며든 그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대가의 눈에 띈 잠재력 넘치는 소년의 연주

비외탕 일가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은 1820년 2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조율사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르클루(M. Lecloux-Dejonc)를 사사한 그는 6세가 되던 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실력을 선보이게 된다.
비외탕은 1827년 11월 29일에 리에지(Liege)의 Socie、te、 Gretry 연주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이듬해 초에는 브뤼셀에서 몇 차례 연주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대(大)바이올리니스트인 베리오(Beriot)의 이목을 끌어 그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1829년 5월에 제자를 파리로 데리고 간 스승은 비외탕의 데뷔를 위한 무대를 개최해 주었고, 그는 로드 협주곡 제7번을 연주하여 청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본 음악회를 지켜본 페티(Fetis)는 비외탕을 ‘타고난 연주가’라 격찬하기도 하였다. 1831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베리오는 탁월한 기량을 지닌 제자를 열성을 다해 4년 동안 지도하였다.

독일 연주여행의 성공과 파가니니와의 만남

1833년 비외탕은 늘 엄격한 연습을 고집했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음악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독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당시에 저명하던 음악가들­슈포어(Louis Spohr), 몰리끄(Wilhelm Bernhard Molique), 마이세더(Joseph Mayseder)­을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접하게 된다. 비외탕은 순회연주 도중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베토벤과 가까이 지내던 음악가들의 사교모임에 합류하게 되면서 1834년 초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실질적으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익히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비외탕은 2주간의 연습 끝에 이루어진 1834년 3월 16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키게 된다. 지휘자이자 비엔나 음악원 학장이었던 란노이(Eduard von Lannoy)는 그의 연주가 ‘독창적이고 참신하면서도 고전적이다’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작곡가 슈만으로부터 그의 연주가 파가니니에 비견된다는 평을 듣는 등 연주여행을 통해 비외탕의 명성이 독일 전역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필하모닉 소사이어티(Philharmonic Society)에서 이루어진 그의 런던 데뷔 무대는 독일에 비하면 그리 열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심어주고 당시 런던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바 있는 파가니니를 만나 음악적 조언을 듣게 된다.

작곡 공부와 러시아 연주여행 재개를 통한 지속적인 발전의 길

비외탕은 1836년 초까지 라이하(Antoine Reicha)에게 작곡을 배우며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스스로 비오티 협주곡의 웅장하고 장대한 형식에 근대의 테크닉적 진보에 발맞춘 화려한 기술을 결합시킨 곡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파가니니로부터의 음악적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는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나중에 협주곡 제2번 Op.19로 출판되었다)이다.
라이하 밑에서 작곡 수업을 마친 비외탕은 1837년 유럽을 돌며 연주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특히 러시아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1840년 3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근간에 작곡된 「환상 카프리스(Fantaisiecaprice) Op.11」과 제1번 협주곡이 초연되기도 하였다. 첫번째 협주곡의 성공 여파는 브뤼셀에서도 이어졌으며, 1841년 1월 12일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는 “훌륭한 독주자로서의 기량이 넘쳐나는 비외탕은 이제 작곡가로서도 그에 못지 않은 명망을 얻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19일에 비외탕은 다시 런던을 찾아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런던을 자주 방문하였고, 1845년 첫 시즌부터 베토벤 4중주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843∼4년, 피아니스트 탈베르크(Talberg)와 함께한 1857∼8년, 그리고 1870∼71년 3회에 걸친 미국 연주여행을 성황리에 끝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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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맞이한 비외탕의 전성기

러시아 황제의 전속 궁정음악 연주자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성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지냈던 1846∼52년의 5년 동안 비외탕은 러시아에서 절찬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d단조를 완성하고, 1851년 12월에 파리에서 연주하였다. 베를리오즈는 제4번 협주곡을 ‘바이올린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장대한 교향곡’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비에니아프스키가 가장 아끼는 곡으로 유명해진 비외탕의 협주곡 제5번 a단조는 1861년에 완성되었다.

혼신을 다한 후진 양성과 벨기에 악파의 성립

1844년에 비엔나 출신 피아니스트인 요제핀 에더(Josephine Eder)와 결혼한 비외탕은 1855년 프랑크푸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나, 1866년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에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해외 연주여행에 몰두하여 그로 인한 성공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1871년 비외탕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뤼셀 음악원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게 된다. 그는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Eugene Ysa¨ye)도 이 시기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73년에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비외탕은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자신의 교수 자리를 임시로 위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877∼8년부터는 병세가 호전되어 조금씩 레슨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1879년에는 학교측으로부터 결국 사임 당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2년 후 알제리 무스타파의 한 요양소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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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와 표현력 사이에 음악적 ‘중용’을 꾀한 독창적인 작곡가

비외탕의 작곡가적인 면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베를리오즈와 다른 평론가들의 일화는 오늘날 다소 과장된 채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 정황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비외탕이 1840년에 그의 첫 협주곡을 작곡했을 때 베리오의 협주곡들은 청중들에게 품위있는 오락거리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고,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 로드(Pierre Rode)와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의 레퍼토리들은 너무 고전적이었던 반면, 파가니니의 협주곡들은(당시는 출판되기 전이었지만) 현란한 기교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비외탕은 솔로 파트를 풍부히 하고, 근대적인 교향곡 구조로 구상함으로써 프랑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개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에는 파가니니의 마법과 같은 기교는 없지만, 베리오와 파가니니의 기술적 요소들을 자신의 독자적인 어법으로 융해시켜 가장 바이올린다운 음악 양식을 창조해냈고, 이는 19세기 내내 유행하게 된다. 비외탕은 제4번 협주곡을 통해 카덴차를 포함하는 즉흥적인 서주곡, 느린 악장, 스케르초와 피날레로 구성되는 4악장 구조 형식을 고안해내었다. 제5번 협주곡에서는 마지막에 카덴차가 붙는 통합된 한 악장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이처럼 비외탕은 협주곡의 개혁자로서 리스트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형식을 적합한 음악적 내용으로 채우는 일에 늘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의 영웅주의는 지나치게 극적이었고, 그의 열정은 너무 수사적이었고, 그의 선율은 과할 정도로 감상적이었다. 매우 잘 작곡된 일부 작품들에 한하여 그러한 그의 음악이 고결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우아함이 넘치는 특색을 띠었다.
비외탕의 바이올린 소품들은 음악적으로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보다 화려하고 밝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걸작들은 오늘날의 얄팍한 솔로 레퍼토리들과는 거리가 있다.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으로 무장된 탁월한 비르투오조

비외탕은 풍부한 음색과 뉘앙스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면서도 정확하고 절도 있는 연주를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발현하는 솔리스트였다. 또한 뛰어난 실내악 주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바흐, 케루비니 등의 작품들로 구성된 실내악 프로그램을 연주하는 연주자 조직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동년배들은 비외탕이 훌츠, 린케(Joseph Linke)로부터 내려오는 비엔나 실내악 전통의 대가라고 서슴없이 칭한다. 이처럼 그는 실내악을 즐겨 연주하며 애호가 양성과 실내악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꾀하였던 것이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바이올린 연주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자, 기교주의에 빠지지 않고 정확한 해석에 바탕을 둔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으로 수많은 청중들에게 뜨거운 감격을 선사한 비외탕은 거장의 면모를 지닌 연주가로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 글·박다미(객원기자)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비외탕(Henry Vieuxtemps, 1820∼1881)은 비에니아프스키(Henrick Wieniawski, 1835∼1880),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와 함께 근대 바이올리니스트 4인방으로 손꼽히고 있다. 파가니니 이후, 그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유일한 제자 카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도 그리고 새로운 비르투오조로서 각광받던 랑베르 마사르(Lembert Massart)도 아니었다.
포스트 파가니니 시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서도 비외탕이 유독 돋보였던 것은 단순히 테크닉의 유연성에서만 기인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비르투오조로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욕망은 작곡가로서의 비외탕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쨌건 동시대의 비르투오조로서 인정받았던 그의 음악은 현재 많은 부분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외탕의 가장 잘 알려진 바이올린 협주곡 5번 Op.37만이 그의 명성을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의미로든 그를 베토벤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19세기에 작곡된 수많은 비르투오조들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도 최고의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이다.
고음악의 경우와는 다르게, 19세기의 많은 음악들이 이런 식으로 묻혀 있는 실정이다. 연주가와 대중들 사이에서 마스네(Juels Massenet, 1842∼1912)의 피아노 협주곡, 포퍼(David Popper, 1843∼1913)의 첼로 협주곡들이 그렇게 잊혀져 갔다. 다만 지난 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알캉(Charles-Valentin Alkan, 1813∼1888)을 비롯한 소수의 음악가들이 새롭게 부각되었고, 그것은 하이페리온을 필두로 한 마이너 레이블들의 지원사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악보 위에서 음표로서만 존재했던 음악들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연주자로서의 비외탕

비외탕의 손에 활이 쥐어진 것은 네 살 때였고, 리에주 지방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르쿨르 데종(Lecoulx-Dejonc)에게 배우게 되었다. 그의 데뷔는 여섯 살 때(1826년) 피에르 로드(Pierre Rode, 1774∼1830)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을 연주함으로써 이루어졌다(그 날 공연에는 그의 스승과 함께 크로이처의 이중 협주곡도 연주되었다). 이 신동의 연주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소문을 들은 베리오는 어린 비외탕을 초대하게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게 해서 비외탕은 분더킨트(Wunderkind)로서의 위상을 높여갔고, 브뤼셀 음악원의 ‘샤를 드 베리오(Charles de Beriot, 1802∼70)’교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이다
당대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하나의 규범처럼 여겨지던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 1755∼1824)’의 제자 베리오 교수에게도 비외탕의 존재는 경이로웠다(베리오는 파가니니의 유일한 경쟁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833년 비외탕은 베리오의 충고를 받아들여 독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거쳐 빈으로 연주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로베르트 슈만과 루이 슈포어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만나기도 했다. 1834년은 기억할 만한 해이다. 왜냐하면 런던에서 파가니니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의 연주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이듬해인 1835년 비외탕이 파가니니를 찾아 파리로 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때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파리에서 리스트를 키운 당대의 거장 안톤 라이하(Anton Reicha, 1770∼1836)에게 작곡 수업을 받게 된다.
그의 삶에서 여행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다. 물론 그의 여행은 콘서트 일정에 묶여 있었고, 그것은 그가 흥행에 성공한 연주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19세기 중엽의 연주회 상황은 파가니니 쇼크 이후, 테크닉의 전시장으로 변했고 대중은 이러한 초절기교에 열광했다).
1833년부터 전 유럽을 무대로 연주여행을 떠났으며, 곳곳에서 그의 초인적인 기교와 꿈꾸는 듯한 음색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가 사용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Cremona, 1710)였는데, 일반적인 바이올린보다 몸통이 조금 크며, 그만큼 풍부한 음색과 다이내믹한 톤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아메리카에 세 번(1844년, 1857년, 1870∼1년)에 걸쳐 장기 콘서트를 떠났는데, 그 중 세 번째 여행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인 ‘탈베르크(Sigismond Thalberg, 1812∼71)’와 함께 했다. 연주 여행의 일원으로 작곡된 작품집이 「아메리카의 추억」이며 이 중 한 곡이 양키 두들이다. 이 곡은 ‘아메리카에게 인사’라는 변주곡 형식으로도 작곡되어졌다. 이들 곡에 대한 레코딩은 ‘양키 두들’의 경우 필립 코흐(Ricercar, 1991), 루지에로 리치(Dynamic, 1992), 그리고 가장 최근의 레일라 조세포비치(Philips, 2000)의 연주가 있으며, ‘아메리카에게 인사’는 제라르 푸레(Auvidis-Valois, 1997)의 연주가 있다.
비외탕의 생애에서 또 하나의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이 음악원 교수로서의 삶이었다. 7년 동안(1846∼1852) 성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로 활동했으며, 1871년부터 3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다가 건강상의 이유(왼손과 왼발의 마비)로 휴직하였다(그 자리는 그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비에니아프스키에게 돌아갔다). 그가 키워낸 제자들은 예노 후베이(Jeno Hubay, 1858∼1937), 으젠느 이자이(Eugene Ysa¨ye, 1858∼1931) 등의 바이올리니스트들로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주요한 구성원으로 활약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유명한 연주가들을 제자로 두었다는 점에서 이렇다할 제자들을 만들어내지 못한 비에니아프스키, 요아힘, 사라사테 등에 비해 비외탕의 존재는 좀더 많은 무게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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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모두 7개가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5번 협주곡만이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 중 조성이 장조인 협주곡이 세 곡(1번, 3번, 6번)이며, 단조의 조성을 가진 협주곡은 2번, 4번, 5번, 7번으로 총 네 곡이 된다(18세기 협주곡의 경우, 대부분이 메이저 음계인데, 반해 마이너의 곡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와 마이너의 음계를 가진 협주곡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838년, 러시아를 여행하고 있던 비외탕은 그의 첫번째 바이올린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Op.10으로 출간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E장조)은 4번, 5번 협주곡과 함께 한때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던 곡이었다. 낭만적 울림이 가득한 전개방식으로 쓰인 이 작품은 이미 조숙한 천재로서 그의 작곡 역량을 가늠하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덜 다듬어진 오케스트레이션과 평이한 구성으로 인해, 비외탕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f#단조)은 1836년에 작곡되었는데,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 1788∼1867)에게서 배운 모든 테크닉과 작곡기법이 이 협주곡에서 새롭게 시도되었다. Op.19로 출판된 이 곡은 아직 파가니니식의 악곡 전개 방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지만, 비외탕 특유의 드라마틱한 구성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그의 비범한 재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1악장에서부터 거침없이 몰아치는 오케스트라와 독주 부분의 카덴차는 그의 모든 협주곡들에 내재된 열정적인 형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평범함과 비범함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A장조는 1844년, 그가 아메리카로 첫번째 연주여행을 다녔을 때 작곡되어진 곡이다. Op.25로 출판된 이 작품은 협주곡 2번과 마찬가지로 파가니니의 영향력이 곳곳에서 묻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좀더 폭넓어진 악곡 전개와 느린 악장의 우아한 선율, 그리고 한 악장 내에서의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자이는 “협주곡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시곡(詩曲)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말했고, 또한 이 작품으로 인해 비외탕은 미성숙의 지점에서 성숙의 지점으로 이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앞서 말한 협주곡 1, 2, 3번을 모두 레코딩한 존재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수학한 미샤 케일린(Micha Keylin)이다. 빠른 패시지에서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왼손의 테크닉, 음과 음 사이를 미묘하게 연결시키는 재능을 소유한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접근 방식은 비외탕의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그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1번과 3번 협주곡의 경우 현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음반이고, 염가반(Naxos, 1995/1999)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2번 협주곡의 유일한 경쟁 음반은 알렉산더 마르코프의 음반(Erato, 1996)인데, 다이내믹한 리듬과 몬테카를로 필의 빛나는 연주에 힘입어 좀더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때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4번 협주곡 d단조는 이젠 자주 연주되지 않고 있다. Op.31로 출판된 이 협주곡은 비외탕이 1850년에 작곡한 곡으로서, ‘협주곡(concertare)’이라는 장르의 어원적 의미(경쟁하다, 협동하다)를 상기시킨다. 콘체르토의 음악적 구성은 독주부와 오케스트라가 대등한 방식으로 서로 유기적인 연결구도를 진행시키는 것이었지만, 파가니니의 등장 이후 오케스트라는 독주자를 위한 반주부로서의 위치만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파가니니는 ‘리토르넬로(ritornello)’라는 낡은 방식을 지속적으로 고수했기 때문에, 테크닉의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측면 외에는 협주곡의 양식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다. 비외탕의 새로운 형식인 이 작품은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콘서트에서는 종종 3악장을 제외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 ‘스케르초 비바체’의 3악장이야말로 독주자의 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며, 폭발하는 아파나시아토의 가공할 음향을 만끽하게 해준다. 이 협주곡의 2악장에선 아르페지오를 들려주는 하프로 인해 좀더 우아한 기품을 갖추게 되었다. 레코딩에는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지휘하는 파리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 이착 펄먼(Itzhak Perlman)의 음반(EMI, 1974)이 있는데 바이올린의 절묘한 톤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야샤 하이페츠와 말콤 서전트(Malcom Segent) 지휘, 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녹음(RCA, 1947)은 SP 시대의 명연으로서 무서운 속도감의 날카로운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감수성이란 측면에서 미샤 케일린의 연주(Naxos, 1995/1999)를 들고 싶고, 또 하나의 선택으로 밀도있는 접근의 알렉산더 마르코프(Alesnder Marcov, Erato, 1996)를 언급하고 싶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라모폰 가이드(Gramophon Guide)와 슈반 가이드(Schuwann Guide)에 올라와 있는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의 레코딩 목록은 이 네 장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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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첼로 협주곡 2번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William Ⅲ)에게, 그리고 첼리스트 조제프 세르베(Joseph Servais)에게 헌정된 두 곡의 첼로 협주곡들은 비외탕의 협주곡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기교적이고 섬세한 독주 악기와 파워풀한 오케스트레이션, 느린 악장의 우아함 등이 바로 그것이다.
a단조의 첼로 협주곡 1번(Op.46)은 1876년 1월에 작곡되어졌고, 그 해 10월 암스테르담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와 첼리스트 요제프 홀만(Joseph Holmann)에 의해 초연되었다. 작곡가 비외탕에게 있어서 1870년대는 그의 인생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맞는 시기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왼쪽의 마비증상으로 인해 브뤼셀 음악원에서의 교수활동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1873년 10월 13일, 비외탕은 한쪽(왼편) 몸 전체가 마비되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머지 반쪽의 부분 또한 언제 마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러고 보면“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isst seele auf)”고 표현한 독일의 영화감독 라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winder, 1946∼1982)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외탕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음악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작곡을 시작했으며, 두 개의 첼로 협주곡은 그러한 작업의 산물이다. 그가 절망에서 희망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때인, 1879년 또 한 차례의 마비증상이 그를 덮쳐왔다. 비외탕은 더이상 바이올리니스트로 혹은 지휘자로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연주가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그는 이제 모든 걸 예감하고서, 가족과 함께 알제리 무스타파에 있는 요양소로 떠났다.
1880년 10월 19일 그의 두 번째 첼로 협주곡(b단조)의 작곡을 마친 그는 “상상해 보세요, 저는 누구나 아름답다고 하는 첼로 협주곡을 이제 막 끝냈습니다. 그것은 세르베에게 헌정되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다음 해인 1881년 6월 6일에 숨을 거두었다.
두 곡의 첼로 협주곡의 레코딩으로는 마리 알링크(Cypress/1998)의 음반과 하인리히 쉬프(Heinrich Schiff)의 음반(EMI, 1985/1986) 이렇게 단 두 종만이 있다. 이중에서 세계 최초 레코딩으로 기록되고 있는 쉬프의 연주는 효과적인 하모닉스 처리와 탄력적인 어프로치로 이 곡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해 주었다. 반면 알링크의 연주는 유려하고 지적인 연주로서 쉬프의 드라마틱한 면에 대비되는 섬세한 측면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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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테크닉을 요하는 소품들

비외탕의 협주곡들이 고난도의 기교를 독주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남긴 소품들 또한 상당한 테크닉을 필요로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그외 꿈, 빛나는 살롱풍의 소품, 지나간 여름의 장미 변주곡, 두려움, 무언가, 엘레지, 그리고 오페라 아리아 변주곡들이 상당수 있다. 각각의 소품들을 모두 설명하기엔 지면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의 소품들을 모아 놓은 음반들을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다.
우선 고드호프(vn)와 잉베르젠(pf), 그리고 콘타르스키(pf)가 연주한 비외탕 소품집 1, 2를 소개하겠다. 오스트리아의 코흐 슈반(Koch-Schuwan) 레코드사에서 녹음된, 두 장의 CD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고드호프는 인디애나 음대에서 루지에로 리치를 사사했으나, 스승과는 다르게 좀더 조심스런 접근으로 실내악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리치(Vn)와 빈센치(pf)의 <비외탕에게 헌정>이라는 앨범(Dynamic)인데, 재미있게도 비외탕이 작곡한 「파가니니에게 헌정」을 수록하고 있다. 이 음반은 무엇보다 테크닉이 뛰어나며, 곳곳에 다이내믹함이 넘쳐나고 있다. 그의 제자 고드호프와는 또 다른 측면의 연주로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비외탕적인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가 좀더 젊은 나이에 레코딩을 했다면 좀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고, 이 레코딩에서 보이는 약간의 불안함들은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코흐(Vn)와 드보스(pf)의 연주가 있는데, 이 음반(Ricercar)의 특색은 앞의 음반들과는 다르게 7곡의「무언가(Romance sans paroles)」가 모두 실려 있다는 점이다. 필립 코흐는 그뤼미오 트리오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연주자로서 실내악적인 울림의 서정적인 분위기로 이 곡이 가진 시적인 성격을 멋지게 살려내고 있다.
비외탕의 소품 중 흥미로운 작품이 몇 작품 더 있는데, 그 중 ‘열정적인 환상곡’은 동시대에 유행했던 단악장의 협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고난도의 기교가 곳곳에서 빛나는 곡이다. 레코딩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기돈 크레머(Vn)와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의 협연(Philips)을 추천하고 싶다.
그의 미완성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올라로 편곡한 음반이 쥐에르(Va)와 드보스(pf)의 연주로 나와 있는데(Talent), 이 CD에는 후베이의 「연주회용 소품」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벨기에-프랑코 악파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그리고 카쉬카시안(Va)과 레빈(pf)이 연주한 <엘레지>(ECM)도 비외탕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음반이며, 세츠조디(Vn)와 카사이(pf)가 연주한 에르켈(Ferenc Erkel, 1810∼93)의 「헝가리 주제에 의한 이중주」(Marco Polo) 또한 비외탕이 바이올린 파트를 작곡해 주었으므로 빼놓을 수 없는 음반이다. 그리고 첼로로 편곡된 곡 중에서 「칸틸레나」를 연주한 클레겔(Vc)과 헤브니스(pf)의 음반(Marco Polo)을 언급하고 싶다. 이밖에 구트만(Vn)과 기구치(pf)가 협연한 연습곡(ASV), 길셀(Vn)과 에인덴(pf)의 「베버 주제에 의한 이중 콘체르탄테」(Pavanne)가 있지만, 카탈로그상에만 있을 뿐 국내에서는 현재 구할 수가 없어 아쉬움을 준다.

앙리 비외탕의 초상

1862년 비외탕이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5번으로 파리에서의 첫번째 공연을 했을 때, 이를 관람한 베를리오즈는 안타까운 듯 “만약 비외탕이 뛰어난 비르투오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서 환호할 수 있을텐데(Si Vieuxtemps n´e tait pas un si grand virtuose, on l’acclamerait comme un grande compositeur)”라는 말을 남겼다. 요컨대 그것은 그가 연주가로서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비외탕의 모습을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리스트’가 그러했듯이 그가 주목받은 것은 작곡가로서가 아니라, 뛰어난 연주가로서의 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작곡가로서의 리스트의 모습을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지만, 리스트 신화의 초점이 그의 작곡이 아니라 연주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모든 전설과 신화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없다는 데 비극이 있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점은 그가 남긴 악보들과 카덴차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들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앙리 비외탕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초상이 그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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