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 (1918 - 1990) |
Leonard Bernstein
글: 김성익
베스트 음반 10선 베토벤 교향곡 전곡/빈 필
1978 Stereo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5번, 치머만 (p)/빈 필
1989 Digital
브람스 교향곡 전곡, 하이든 주제에의한 변주곡, 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빈 필
1981, 1982 Digital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크레머/빈 필
1982 Digital
말러 교향곡 전곡/뉴욕 필, 빈 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1970s-1980s Stereo, Digital
모차르트 레퀴엠/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1988 Digital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뉴욕 필
1986 Digital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빈 필
1986 Digital
드보르작 교향곡 9번/뉴욕 필
1986 Digital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1982 Digital
지휘자로서 전성기때의 번스타인
Photo: Artur Umboh/DGG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1918-1990),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태인의 피를 이어받은 이주민이었다.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것은 보편적인 미국인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감수성이 예민한 번스타인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했을 테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정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이 번스타인의 성격을 크게 좌우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가지 흠이라면 그 당시 어려운 삶을 꾸려 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번스타인에게 대한 음악교육이라는 측면이 그렇게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의 생애 그는 하버드에 진학해서 문학과 철학을 먼저 전공하지만 결국은 음악에 자신의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번스타인은 프리츠 라이너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후 1940년 번스타인은 보스턴에서 열린 탱글우드 축제를 통해서 쿠세비츠키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곧 그의 보조 지휘자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44년 뉴욕 필의 연주회 때 당시 부르너 발터의 병으로 인해서 처음으로 뉴욕필의 지휘대에 올라서게 되었다. 갑작스런 지휘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연주회를 이끌어 냄으로써 번스타인은 자신의 태동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에 다른 오케스트라 지휘도 맡으면서 뉴욕필의 부지휘자에 오르게 된다. 다음 해에는 드디어 뉴욕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다.
1958년부터 1969년까지 정말 놀랄 만한 명성을 얻게 된다. 이것은 항상 유럽의 문화적 식민지라는 열등감의 해소와 맞물려 아주 이상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을 경계로 번스타인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유럽으로의 진출이다. 그리고 당당히 번스타인은 성공하게 되며 카라얀과 유럽에서의 격전을 펼치게 된다. 진정한 음악사에 대한 기여는 이 유럽에서의 성공이 더 큰 의미를 준다. 단순히 그를 대표할 만한 연주곡목들만을 살펴봐서도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써, 한가지 일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번스타인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 교육가, 지휘자 어느 한 쪽을 포기할 수 없으며 전체로써의 번스타인이 존재하게 된다. 유럽에서의 성공 후에 미국으로 돌아와 탱글우드 축제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에게는 작곡가의 내면을 투영해 낼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소유한 세밀한 스캐너와도 같았다. 특히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아주 명확하게 작곡가의 의도를 청취자에게 전달해주었다. 이 과정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히 그는 위대한 음악적 심상의 전달자임에는 별 다른 의의가 없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뉴욕필과 행해진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는 그의 이런 면들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뉴욕필의 시기에는 상당히 강건하고 튼튼한 음을 쌓고 있지만 유럽의 시기에는 상당히 다른 면들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곡이 길어지지만 세부적으로는 빠른 부분은 빠르게 그러나 느린 부분에서는 엄청 늘어난 스케일의 연주를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의 전형은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브람스 교향곡을 거쳐서 드디어 말러 교향곡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의 연주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드볼작 교향곡 9번, 모차르트 레퀴엠, 부르크너 교향곡 9번,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다. 혹자는 이러한 자의적인 템포변화에 경멸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올바른 이해의 태도가 아니며 획일적인 가치관이 적용될 수 없는 경우이다. 이러한 템포 표현과 더불어 도이치 그라마폰 (DG)의 훌륭한 녹음 철학도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항상 고른 수준의 음질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감상자로서는 아주 흡족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음반 녹음이 전부 라이브로 녹음되었다는 점이다. 그날의 연주회마다 가장 잘 된 녹음만을 음반에 담은 경우도 있지만 실황에서 스며나오는 열기를 충실히 전달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번스타인의 음악
1990년 탱글우드에서의 마지막 콘서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연주하고
무대를 떠나는 번스타인의 뒷모습뉴욕필 시기에는 최초의 말러 전곡 녹음이 빛나지만 그의 대부분의 명연은 도이치그라마폰에서 이루어졌다. 그 첫 테이프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다. 그를 단숨에 성공으로 이끈 음반이다. 특히 3번, 7번, 9번이 우수한 해석을 보여준다. 9번은 푸르트벵글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라이브 녹음이지만 아주 우수한 연주를 들려준다. 그러나 5번은 다른 곡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감동이 약하다. 다음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다. 특히 1번의 경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만한 열정을 가진 연주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전체적으로 브람스 교향곡은 강건하면서도 정열적인 연주를 펼치며 이를 통해서 번스타인이 나타내고자 했던 브람스는 바로 우수에 찬 브람스가 아니라 힘찬 패기를 가진 브람스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말러 교향곡들이다. 세 번째 말러 전집에 도전한 번스타인은 마지막 8번과 10번을 남겨둔 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 엄밀하게는 완성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말러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보다 심오하게 번스타인은 음악에 대한 고찰이 깊어져만 갔다. 말러 교향곡은 20세기의 커다란 유산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번스타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이제 더 이상의 말러에 대한 해석은 종지부가 찍히면서 새로운 세기를 향한 음악을 갈구해야 한다고 본다. 말러 교향곡 중에서 번스타인은 7번 교향곡을 두번째로 녹음했으며 전집중에서 가장 훌륭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체적인 말러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은 60년대 뉴욕필과 유사하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것이 7번이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되게 말한다면 더 이상의 7번은 없다고 해도 괜찮을 듯 하다. 그리고 말러 9번에 대해서는 카라얀을 무참히 격침시킬 수 있는 베를린 필과의 역사적인 음반이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현악기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끈다. 번스타인 자신도 마지막 악장에서는 못내 엄청난 감정이입에 들어간다. 이 음반은 그날의 격앙된 감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엄청난 기회를 우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번스타인은 말러, 베토벤, 브람스 외엔 별다른 명반이 없느냐? 그것은 아니다. 차이콥스키 교항곡 6번의 마지막 악장을 말러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의 연장선처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드볼작, 시벨리우스 등으로 이어진다. 그는 훌륭한 오페라 음악도 남겼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외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에서 빠질 수 없는 오페라가 바로 베토벤의 "피델리오" ,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이다. 또한 비제의 "카르멘"도 카라얀을 대적할 명반이다. 결국 번스타인의 명반들은 대체적으로 기교적으로 완벽주의 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리듬감과 색채 중심적인 특히 어두운 색체의 종교음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대미사" , 베토벤의 "장엄미사" , 하이든의 "천지창조"등이다. 번스타인을 이야기하면 번스타인 자신의 곡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번스타인의 자기연주가 상당히 즉 흥적인 면 이외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휘자 번스타인이 아니라 작곡가 번스타인으로 관점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이 20세기 후반을 카라얀과 양분한 위대한 지휘자로써 손색이 없는 것은 그의 투 철한 음악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나누어지게 하기 위해서 번스타인은 그렇게 지휘대에서 껑충껑충 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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