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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1923-1977)

♣ 풍경소리~~♬ 2006. 11. 8. 16:32
마리아 칼라스 (1923 - 1977)
99년 6월 제4호

Maria Callas

글: 이정아

 
베스트 음반 10선
도니제티: 람머무어의 루치아
세라핀 (지휘)/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MI 2CD) 1959 Stereo

도니제티: 람머무어의 루치아
세라핀 (지휘)/Orchestra del Maggio Musicale Fiorentino (EMI 2CD) 1954 Mono

벨리니: 노르마
세라핀 (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3CD) 1954 Mono

비제: 카르멘
프레트레 (지휘)/파리 국립 가극장 오케스트라 (EMI 2CD) l964 Stereo

푸치니: 라 보엠
보토(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7

푸치니: 나비부인
카라얀(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5

푸치니: 토스카
사바타 (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3

베르디: 리콜레토
세라핀 (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5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카라얀 (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6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줄리니 (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EMI 2CD) 1955
 
M. Callas
전성기때의 마리아 칼라스
 
칼라스의 생애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1937년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되돌아왔으며 이듬해부터 아테네의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5년까지 그리스에서 착실한 경력을 쌓아가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가 소란스러워지자 다시 미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다. 이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하게 된다. 그후 힘들게 얻어낸 계약도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다시 좌절에 빠지지만 그 기획사의 멤버이기도 했던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1947년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La Gioconda"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되어 6월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이때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 지오반니 파티스타 메네기니를 알게된다. 8월 2일 이탈리아 데뷰 공연을 세라핀의 지휘로 갖게 된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음에도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서 추가 계약은 맺어지지 않았지만 그해 12월에 이탈리아어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을 부르게되고 푸치니의 "투란도트"중 타이틀롤로 재계약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1949년에는 이탈리아 벨칸토 레파토리를 부르는 소프라노로서의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지휘자 세라핀의 강력한 고집으로 마카레타 카로시오가 맡았던 "I Puritani"에서 엘비라역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해 4월 21일에는 메네기니와 결혼하게되고 남편으로서 그리고 매니저로서 메네기니의 도움을 받아 2년간 이탈리아와 유럽등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결국 칼라스는 1951년 라 스칼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시즌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1958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맡게된다. 그녀는 곧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같은 벨칸토 레파토리로 옮기기 시작함으로써 수년동안 무시당했던 많은 오페라의 레파토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1952년 6월엔 EMI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죠반니"중의 돈나 안나의 아리아 "Non mi dir"를 테스트로 녹음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칼라스는 뚱뚱하고 덩치 크고 껑충해서 외모는 그리 매력이 없었는데 1954년 극히 짧은 기간만에 30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해서 그녀의 외모는 타인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급격히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만은 여전히 굵은 편이어서 칼라스는 발목이 드러나는 차림은 피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56년엔 과거 그녀를 오디션에 탈락시켰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 "노르마"를 부름으로 해서 최초로 서게되고 "토스카"와 "루치아"도 공연하게 된다.

1957년엔 베니스의 한 파티에서 메네기니와 칼라스 부부는 후에 칼라스의 연인이 되게 되는 그리스의 선박 재벌 오나시스를 처음 만나게된다. 1958년은 칼라스에게 많은 사건이 터지는 해라고 기억된다. 1월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했던 "노르마"의 로마에서의 갈라 콘서트에서 1막이후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퇴장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때문에 언론에 호된 지탄을 받게된다. 또한 그해 5월엔 라 스칼라의 감독 기링겔리와 말다툼후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다시는 라 스칼라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11월엔 메트르폴리탄에서도 해고된다. 하지만 12월 19일에 파리에서 갖은 데뷰 갈라 콘서트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만큼의 대성공을 거두게된다. 이때 청중속에 있던 오나시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한다. 결국 이듬해 6월 메네기니 부부는 오나시스의 요트에 초대받게되고 항해가 끝나갈 즈음엔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연인이 되어있었으며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끝나버리게 된다.

1960년부터 61년까지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은 포기하고 오나시스와 함께 화려한 상류생활을 즐기는데만 집착한다. 제피렐리의 설득으로 1964년부터 코벤트 가든에서의 "Tosca"를 시작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된다. 이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전성기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공연들은 대성공을 거둔다. 점점 목소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칼라스는 의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 로얄 갈라 콘서트를 열게되는데 이것이 오페라 가수로서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스 국적을 가짐으로 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한다. 오나시스가 그녀와 결혼해 줄것을 기대했으나 관계가 멀어져가던 오나시스는 1968년 J.F.케네디 미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버린다. 칼라스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1971년과 72년, 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일련의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또한 그녀의 옛동료이자 만년의 연인이자 친구가 된 주세페 디 스페파노와 재회한다. 1973년 스테파노는 그의 딸의 치료비를 위해서 마리아를 설득해 전세계 투어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이 공연은 74년까지 계속된다. 1974년 11월 일본 사포로 공연을 끝으로 스테파노와의 공연은 끝이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이로써 스테파노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된다. 1975년엔 오나시스가 죽게되고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54세의 나이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홀로 죽을때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하게된다.

"Singing for me is not an act of pride, but an effort to elevate towards those heavens where everything is harmony."
- Maria Callas

M. Callas
무대의상의 마리아 칼라스
 
칼라스의 음악
필자가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드라마틱함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페라의 매력에 필자를 빠져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마리아 칼라스이다. 마리아 칼라스를 알고 난 이후에야 "인간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최고의 악기이다."라는 조금은 식상한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필자가 칼라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마무어의 루치아"에서 결혼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하고 미쳐버린 후 부르는 소위 광란의 아리아 (Scena dalla pazzia)를 듣고부터다. 그 때 말로 표현할수 없는 감동으로 빠져버렸으며, 그 이후 마리아 칼라스라는 여인은 필자의 여신이 되어버렸다. 또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서 "In mia man' alfin tu sei (마침내 그대는 내 수중에)"라는 아리아를 부른 후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드루이드의 여승인 노르마역도 칼라스 아니면 불가능한 매력을 풍긴다. 미친 여인과 복수에 가득찬 여인, 완전히 다른 성격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반대의 모습으로 바꾸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할 수 밖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연약하고 섬세한 질다를, 정열적이면서도 요염한 카르멘을 마리아 칼라스에게서 기대한다면 아마도 실망을 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함을 느낄수 있는 콜로라투라보다는 오히려 아주 파워풀한 느낌으로서 시원함을 갖게 한다. 때때로 아주 경직되어 있으며 듣기 거북스러운 쇳소리가 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약함이나 요염함 보다는 카라스마적인 것을 느낀다면 마리아 칼라스의 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라는 쟝르는 설정된 대본에 의해 무대위에서 소프라노를 비롯한 배우들이 연기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만 배우들이 어느만큼 그 연기에 얼마나 몰두할 수 있을까 하는것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특히 칼라스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아닌 다른 소프라노들도 열심히 노래를 했지만 필자가 느낀 바는 "람마무어의 루치아"를 듣고 있으면 루치아가 아닌 마치 마리아 칼라스가 미쳐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것이다. "노르마"를 듣고 있으면 여신인 노르마가 불타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칼라스가 불타 죽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칼라스는 주어진 배역에 스스로를 던져버려 몰입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이런 특징이 잘 살아있은 음반으로 줄리니와 함께한 1955년 스칼라 극장의 시즌 첫 공연의 실황음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니의 곡에 대한 사랑이 잘 들어나는 반주와 함께 극의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배역과 자신을 합일시키는 칼라스는 결국 그녀의 죽음에 도달하면 청자로 하여금 극과 현실을 혼돈시킬 정도의 몰입된 노래와 연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이날 객석은 눈물바다가 될만치 감동적인 공연이었다한다.

또한 마리아 칼라스라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리아를 듣고 있으면 카리스마라는것을 느끼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낀다. 아름다움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와 닿는것이다. 아름다움은 다른 소프라노를 통해서도 느낄수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라는 것은 필자가 여러 음반을 그리고 여러 소프라노를 들어봤지만 아직까지 마리아 칼라스 만큼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다가온 사람이 없다.

필자가 비제의 "카르멘"을 처음 들었을 때 카르멘이란 여인에게서 연상되는것을 열거하자면 일단 주 무대인 스페인이 먼저 생각나고, 영화배우인 소피아 로렌, 그리고 영화 "해바라기"가 생각난다. 말하자면 "정열"과 "요염"이란 단어가 연상되었다. 마리아 칼라스와 요염함,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마음속에 내재된 요염함으로 따진다면 마리아 칼라스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물론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드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원하는(?) 요염함을 묘사하자면 마릴린 먼로형의 백치미를 갖고 스커트를 살랑 살랑 흔들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육체파의 요염함보다는 소피아 로렌형의 아주 쌀쌀맞고 냉정하면서도 지적인 눈빛 하나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수 있는 지성파의 모습이다. 어쩌면 소피아 로렌이란 여인과 마리아 칼라스라는 여인을 합한 필자의 이상형일수도 있다. 카르멘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리일까?

베스트 10이란 이름으로 10개의 타이틀을 선택하였지만, 사실 베스트 10 이라고 하니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굳이 순서를 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녹음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이건 별로야"라고 할 수가 없기에, 필자의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음반들의 순서라고 말할수 있다. 만약 마리아 칼라스의 매니아가 되고 싶다면, 하일라이트 판이 아닌 전곡반을 반드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던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은 마리아 칼라스에 중독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She shone for all too brief a while in the world of opera, like a vivid flame attracting the attention of the whole world, and she had a strange magic which was all her own. I always thought she was immortal - and she is"
- Tito Gobbi (Baritone)